포도가 익었다. 집이 보이기 전에, 차 안에서부터 영천의 언덕 빛깔로 알 수 있다. 아버지라면 이번 주에 수확했을 텐데. 그가 죽은 지 9일째, 포도들은 그 사실을 모른다.
은영이 마당에 서 있다. 고무장화를 신고, 상자를 허리에 받쳐 들고. 그녀는 아버지의 아내다. 나보다 다섯 살 위다. 늦게 온 납품업자를 보듯 나를 바라본다.
“벌써 시작했네.” 내가 말한다. “수확은 장례를 기다려 주지 않아.” 그녀가 말한다. “아들도 기다려 주지 않고.” 상자를 내려놓는다. 손은 포도즙에 새파랗다.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, 그녀가 이 탁자에서 장갑 없이 손을 쓰는 걸 본 적이 없다.
변호사가 말했다: 절반씩. 집, 언덕, 이름. 나는 팔려고 했다. 차 안에서 이미 결정했다. 경주 어딘가를 지나면서. 그런데 지금 마당에 서 있고, 지하 저장고에서 포도즙 냄새가 올라오고, 그 결심이 흐릿해진다.
“아래쪽 구역에 사람이 필요해.” 은영이 말한다. “옆집 아들이 아파서.” 그녀는 ‘도와줘’라고 말하지 않는다. 내가 거절할 수 있게 말한다. “나는 포도 농사꾼이야.” 내가 말한다. “알아.” 그녀가 말한다. “그분이 자주 얘기했어.”
어두워질 때까지 일한다. 세 줄 사이를 두고, 말없이. 그녀의 가위 소리가 아버지에게서 익숙한 리듬으로 딸깍인다. 아버지가 그녀에게 가르쳐준 것이다. 그 생각이 아프다.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.
줄 끝에서 그녀가 나를 기다린다. 포도 한 알을 내민다. 맨 아래 송이에서 하나만. “맛보세요.” 그녀가 말한다. “올해 이 포도에 대해 그분이 옳았는지 말해 줘요.” 그녀의 손가락은 차갑고, 내 손가락을 물들인다.



